신군부 정호용 사망 원인|나이 고향|가족 부인 자녀|계급|국방부 장관

2026년 9월 13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마다 이름을 남겼던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이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전두환·노태우와 인연을 맺고 하나회에 참여했던 그는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며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특히 5·18 당시 육군특수전사령관이었던 그는 광주 진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두고 오랜 세월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과거 행적에 대한 책임론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법원의 유죄 판결까지 받게 됩니다. 말년까지도 5·18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밝혀왔던 만큼, 그의 삶은 군부 권력과 민주화, 그리고 과거사 청산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은 군인에서 장관과 정치인으로 이어진 정호용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걸어온 길과 12·12, 5·18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을 차분하게 돌아보겠습니다.
❖ 이름
정호용 (鄭鎬溶)
❖ 생년월일
1932년 9월 10일
❖ 사망일자
2026년 9월 13일


❖ 나이 / 향년
94세
❖ 고향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사망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아주대학교병원
❖ 본관
연일 정씨


❖ 학력
남산국민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 32회)
육군사관학교 (11기)
서울대학교 대학원 (화학공학 / 석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
❖ 주요 경력 / 이력
제50보병사단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제3야전군사령관
제4대 육군특수전사령관
제25대 육군참모총장
제45대 내무부장관
제25대 국방부장관
제13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 민주정의당 / 초선)
제14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 무소속 / 재선)
❖ 군 복무 기간
1955년 ~ 1985년


❖ 군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4성 장군
❖ 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 가족 관계 / 집안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 부인
김숙환 (1936년생)
자녀
딸 4명


❖ 신체
키
공개되지 않음
❖ 종교
공개되지 않음
❖ 전 국회의원 지역구
대구 서구 갑
❖ 선거 이력 / 입후보 경력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 민주정의당 / 당선 / 초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 무소속 / 당선 / 재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 무소속 / 낙선


❖ 당적 / 소속 정당
무소속
❖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사망 원인 / 병명
노환으로 인한 건강 악화
❖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빈소 / 장례식장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장례 일정 / 발인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


❖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장지 / 묘지
공개되지 않음
❖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소개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이 2026년 9월 13일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건강이 악화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 전 장관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군인과 관료, 정치인을 거치며 오랜 기간 공직에 몸담았던 인물이지만, 동시에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책임 논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5·18 당시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만큼 광주에서 벌어진 군의 진압 과정과 관련해 그의 역할과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관련 사건으로 법원의 유죄 판단을 받았고, 훗날에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다른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삶이 마무리됐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정호용은 1932년 9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남산초등학교와 경북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경북고등학교 32회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대구에서 성장한 그는 훗날 대한민국 군부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태우와 인연을 맺었으며, 두 사람은 이후 육군사관학교에서도 동기로 지내게 됩니다. 노태우의 처남인 김복동 역시 경북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함께한 동기였습니다. 이렇게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인맥은 훗날 군부 내에서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와도 연결되며 정호용의 군 경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정호용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955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간 그는 1960년대 이후 승진을 거듭하며 군 내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964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함께 이른바 하나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회는 육사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공식적인 군내 사조직으로, 훗날 한국 정치와 군부 권력의 향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정호용의 군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는 특수전 분야였습니다. 1974년 제7공수특전여단이 창설되면서 초대 여단장을 맡았고, 이후 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978년에는 제50보병사단장에 취임하면서 대구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군 지휘관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든 12·12 군사반란이 발생합니다. 당시 정호용은 수도권 부대의 직접적인 지휘관은 아니었기 때문에 반란에 직접 가담한 인물들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었지만, 이후 신군부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분류됩니다. 반란이 성공한 직후인 12월 13일에는 정병주의의 뒤를 이어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오히려 신군부 내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로 올라서게 됩니다.
정호용의 이름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무겁게 거론되는 시기는 1980년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당시 그는 육군특수전사령관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에는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가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한 폭력적인 진압과 인권 침해가 발생했습니다. 정호용은 당시 광주와 서울을 여러 차례 오가며 현지 상황을 보고받거나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 작전을 앞두고 육군본부로부터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 공수부대에 전달한 사실 등이 훗날 그의 책임 문제와 함께 거론됐습니다.
정호용 측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그는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부대들이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에 배속돼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현장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2021년에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개인 자격으로 조사를 신청하면서 자신은 광주 진압 작전에서 배제됐으며, 광주를 방문한 목적 역시 작전 지휘가 아니라 통신 보안과 인사, 군수 지원 등의 업무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5·18의 책임자로 지목된 것은 훗날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정호용을 둘러싼 법적 판단은 그의 주장과는 달랐습니다. 1989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등을 거치면서 5·18 당시 신군부의 지휘 체계와 군 내부 인맥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 제기됐고, 1990년대 들어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습니다. 1996년 검찰 수사에서는 정호용이 5·17 내란 모의에 참여하고 5·18 진압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이후 재판을 거쳐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 모의 참여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을 인정해 징역 7년을 확정했습니다. 이 판결은 정호용의 역사적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대목이 됐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정호용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습니다. 특전사령관을 수행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고 1981년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같은 해 12월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후 제3야전군사령관을 맡았으며, 1983년 12월에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습니다. 1985년 12월 군에서 전역한 뒤에는 일해재단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군복을 벗었지만 그의 공직 경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파장이 거세던 시기에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됐습니다. 당시 정권은 사건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을 통해 박종철 사건 축소·은폐 의혹이 폭로되면서 정국은 더욱 요동쳤습니다. 결국 노신영 국무총리와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개각 과정에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정호용은 다시 국방부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습니다. 전두환 정부 말기 국방부장관을 맡았던 것입니다. 재임 기간이 길지는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많은 업적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해병대사령부 재창설이 이뤄졌고 2군 지역에 군단 2개가 창설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국방부장관이라는 직책 자체가 그가 군부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리였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 서구 갑에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과거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거세졌습니다. 특히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문제를 다루는 청문회가 열리면서 정호용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국민적 비판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정호용은 1990년 1월 8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이후에도 정치적 재기를 시도했지만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 재보궐선거 출마를 추진했으나 결국 후보직에서 사퇴했고,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친여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소속 문희갑 후보를 누르고 다시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민주자유당에 복당했고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되찾았습니다.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과거 군부 정권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본격화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다시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1996년에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다시 구속됐습니다. 같은 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수감된 상태에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습니다. 이후 1997년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이 이뤄지면서 석방됐습니다. 정치권에서 사실상 영향력을 잃은 뒤에는 학업에도 힘을 쏟아 1992년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무역경영 전공으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9년에는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제무역학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석방 이후 정호용은 과거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비교적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2002년에는 정씨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습니다. 이후 공개적인 정치 활동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12·12와 5·18 당시 신군부 핵심부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를 다룰 때마다 꾸준히 등장했습니다. 특히 201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40주년을 맞은 날 전두환, 최세창 등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회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정호용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침묵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1999년 방송 인터뷰에서는 6월 항쟁 당시 군부대가 시위 진압에 투입될 가능성에 대해 후배 군인들이 자신을 찾아와 반대 의견을 전달했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해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에게 이러한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발언은 그가 군 내부에서 민주화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말년의 정호용은 5·18과 관련해 자신에게 제기된 책임론을 적극적으로 반박했습니다. 2021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자진해 조사를 신청하면서 자신이 진압 작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다시 밝혔습니다. 광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것도 군수와 통신, 인사 등 지원 업무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이 정치적인 이유로 5·18 책임자로 몰렸다는 취지의 주장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미 법원의 판결을 받은 사실과 맞물리면서 여전히 논쟁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정호용의 역할은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2024년에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광주 재진입 작전 당시 병력을 동원하고 지휘한 의혹 등을 근거로 정호용을 내란목적살인 혐의 등으로 다시 고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호용은 이와 관련해서도 5·18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결국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제기된 5·18 관련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2026년 9월 13일, 정호용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특히 신군부 핵심 인물로 거론됐던 인물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알려졌던 만큼, 그의 사망으로 5·18 당시 군 지휘 체계와 진압 과정의 구체적인 진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하나 더 사라졌다는 아쉬움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호용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 전쟁 속에서 군에 입대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까지 오른 군인이자 관료, 정치인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민감하고 아픈 사건들과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으며, 결국 법원에서 내란 관련 혐의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을 단순히 한 명의 군인이나 정치인의 성공과 실패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호용 개인의 인생에는 대한민국이 전쟁과 군사정권, 권위주의 통치, 민주화와 문민정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과정이 고스란히 겹쳐 있습니다. 육사 11기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동료들과의 관계,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5공 청문회, 문민정부의 과거사 청산까지 그의 삶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5·18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은 끝내 역사적 논쟁으로 남게 됐습니다. 본인은 진압 작전을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의 내란 관련 행위와 5·18 진압 과정에서의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결백 또는 제한적인 역할을 주장하며 진상규명 절차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5·18 유공자와 피해자 측의 비판 역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정호용의 이름이 앞으로 역사책과 기록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는 단순히 그의 군 경력이나 장관·국회의원이라는 직함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94년의 세월 속에는 개인적인 성공과 군인으로서의 명예, 정치적 부침뿐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두운 장면과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변화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호용은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남긴 논쟁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2·12와 5·18 당시 실제 지휘 체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누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더욱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습니다. 역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증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문서와 기록, 증언과 판결, 그리고 당시 상황을 종합해 끊임없이 검증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94년의 생을 마친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그는 대한민국 군의 최고위직까지 오른 군인이었고,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관료였으며,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12·12와 5·18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따라붙었습니다. 이제 그가 남긴 발언과 주장, 법원의 판단, 당시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의 역할을 차분하게 살펴보는 일은 후대의 몫이 됐습니다.


결국 정호용이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지는 시간이 더 흐른 뒤에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 한가운데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이 군사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희생과 갈등을 겪었는지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진실을 둘러싼 논쟁은 이제 역사 기록과 후대의 검증에 맡겨졌습니다. 역사는 진실을 기억할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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