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의역사인물

충무공 이순신 가계도|묘소|후손|키|고향|어록|전적|난중일기|

by 정보주민센터 2026. 2. 4.
반응형

충무공 이순신 가계도|묘소|후손|키|고향|어록|전적|난중일기|


이순신은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던 시대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문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무인의 길을 택하며 일찍부터 책임과 절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지방의 작은 관직에서 쌓은 경험은 훗날 대전란 속에서 냉정한 판단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바다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연이은 해전 승리는 조선 수군의 존재를 되살렸고, 백성들에게 다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정치적 오해와 시련 속에서도 그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의 이름은 한 장수의 전공을 넘어, 위기의 시대와 맞선 한 인간의 선택으로 이어져 전해집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 성명 / 이름

이순신

 

❖ 본관

덕수 이씨

❖ 생년월일

1545년 4월 28일

 

❖ 태어난 곳

한성부 남부 건천동

❖ 사망일

1598년 12월 16일

❖ 사망한 곳

경상도 남해현 군내면 관음포

 

❖ 향년 / 나이

53세

 

❖ 신체

키 171cm (6척) 추정

❖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 자

여해(汝諧)

이는 《서경(書經)》에 전하는 고사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전해집니다. 순임금이 자신의 뒤를 이을 인물로 우 임금을 지목하며, 세상을 맡길 사람은 오직 그뿐이라는 뜻을 담아 말한 대목에서 따온 말입니다. 당시 순임금은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화평하게 이끌 수 있는 존재로 우 임금을 평가했으며, “오직 너만이 이를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했습니다.

 

❖ 호

기계(器溪) / 덕암(德巖)

 

❖ 가계도 / 가족관계

부모님

아버지 이정

어머니 초계 변씨

배우자 / 부인

방수진 (상주 방씨)

첫째 아들

이회

둘째 아들

이예

셋째 아들

이면

1명

후첩

해주 오씨

서장자

이훈

서차남

이신

서녀

2명

❖ 이순신 후손

덕수 이씨 충무공파 13대손 이종학 (74세)

❖ 출사 / 임관

무과 식년시 병과 급제 (1576년)

 

❖ 시호

충무 (忠武)

 

❖ 봉호

덕풍부원군

❖ 추증 관직

의정부 영의정

 

❖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 정유재란 전적

45전 40승 5무 추정 - 무

 

❖ 충무공 이순신 저서 / 책

난중일기 (亂中日記)

충무공이순신전서 (忠武公李舜臣全書)

❖ 삼도수군통제사 재임 기간

1차 : 1593년 9월 12일 ~ 1597년 3월 14일

2차 :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 충무공 이순신 명언 / 어록

차수약제, 즉사무감. 此讐若除, 則死無憾.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망령되이 움직이지 마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금신전선, 상유십이,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今臣戰船, 尙有十二,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

이순신은 16세기 말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시기에 조선 수군을 이끌며 국난을 극복한 무신입니다.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원칙과 책임을 놓지 않았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장기간의 전쟁 속에서 수차례의 승전과 깊은 시련을 겪었으며, 끝내 자신의 생을 바쳐 나라를 지켜냈다고 전해집니다.

 

이순신은 1545년 한성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입니다. 문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무인의 길을 택했고, 1576년 무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함경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비교적 낮은 관직을 전전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행정과 군사 양면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상관의 부당한 요구에도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라좌수영 재직 시에는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 벌목을 거부해 미움을 사기도 했는데, 이는 군비와 국가 자산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근무하던 시기에는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녹둔도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피해가 컸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아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전장에 나서 공을 세우며 복직했고,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전쟁의 냉혹함과 지휘관의 책임을 더욱 깊이 각인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전라관찰사 이광과 류성룡의 눈에 들어 요직을 거치게 되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592년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순신은 이미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습니다. 왜군의 침입 소식을 듣자마자 조정과 각 지역에 급보를 올렸고, 병력을 소집해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군紀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도주를 시도한 병사를 처형하는 결단도 내렸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지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판단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순신의 첫 승전은 옥포 해전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정박해 있던 항구를 기습해 다수의 적선을 격파하며 조선 수군의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이어진 합포와 적진포 전투에서도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조선 수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사천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고, 이순신은 직접 부상을 입으면서도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이러한 연전연승은 육지에서 연패하던 조선 조정과 백성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의 전략적 역량이 정점에 이른 전투로 평가됩니다. 그는 학익진을 활용해 일본 수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포위 섬멸했고,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해상 보급로를 상실했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노리던 계획도 좌절되었습니다. 이후 부산 앞바다까지 진격해 적선을 대파하며 조선 수군은 남해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정치적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특히 원균과의 불화는 조정 내 당파 싸움과 맞물려 점점 심화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신중한 방어 전략을 유지하려 했으나, 조정은 이를 소극적이라 판단해 압박을 가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유재란 직전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으며,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적인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그는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큰 슬픔을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떠난 자리는 곧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고, 남은 함선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불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남은 배는 12척뿐이었지만, 그는 수군 폐지 명령을 거부하며 아직 싸울 수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이후 벌어진 명량 해전은 이순신의 결단과 지형을 읽는 통찰력이 빛난 전투였습니다. 그는 조류가 거센 울돌목을 활용해 수적으로 압도적인 일본 함대를 상대했고,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정유재란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조선과 명 연합군은 다시 주도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1598년 일본군이 철수를 결정한 뒤에도 이순신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노량 해전에서 그는 명나라 수군과 함께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했고, 전투의 한복판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움의 흐름을 걱정하며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서도 왜군을 물리쳤고, 죽어서도 적을 꺾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후에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최고 관직에 올랐고, 마침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순신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책임과 절개, 그리고 나라를 향한 헌신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전쟁의 영웅담을 넘어, 위기의 시대에 무엇이 진정한 지도력인가를 묻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이순신의 삶은 수많은 전투의 승패를 넘어 한 인간이 끝까지 지켜낸 책임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권력이나 명예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억울한 누명과 좌절 속에서도 원망보다 사명을 택했습니다. 다시 주어진 기회 앞에서는 남은 것이 적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은 선택은 그의 삶을 더욱 또렷하게 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태도와 정신은 시대를 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한 시대의 영웅이자 기준으로 기억됩니다.


 

2025.07.19 - [우리의역사인물] - 세종대왕 이도|이름|탄신일|훈민정음|가계도|재위기간|업적|책

 

세종대왕 이도|이름|탄신일|훈민정음|가계도|재위기간|업적|책

세종대왕 이도|이름|탄신일|훈민정음|가계도|재위기간|업적|책세종대왕(世宗大王, 본명 이도)은 조선 제4대 국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천한 ‘성군(聖君)’으로 평가받습니다. 1

information.homeostasises.com

2025.07.30 - [우리의역사인물] - 조선 태종 이방원|재위기간|가계도|출생|헌릉|생애|주요 업적|책

 

조선 태종 이방원|재위기간|가계도|출생|헌릉|생애|주요 업적|책

조선 태종 이방원|재위기간|가계도|출생|헌릉|생애|주요 업적|책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조선 초기 왕권을 공고히 한 인물입니다. 과단성과 결단력으로 제1·2차 왕자의

information.homeostasises.com

2025.07.29 - [우리의역사인물] - 정조대왕 이산|이름|탄신일|수원화성|가계도|재위 기간|업적|책

 

정조대왕 이산|이름|탄신일|수원화성|가계도|재위 기간|업적|책

정조대왕 이산|이름|탄신일|수원화성|가계도|재위 기간|업적|책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1752~1800)는 탁월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으며 조선 후기 정치·문화·사회 전반에 큰 족적을

information.homeostasises.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