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인물 충의공 엄흥도|묘소|기념관|본관|엄흥도 단종 동상|가계도

엄흥도는 조선 초기 격동의 정치 현실 속에서 이름보다 행동으로 기억된 인물로 전해집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오른 대신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도 아니었으나 한 왕의 마지막 순간과 깊이 연결된 삶을 살았습니다. 단종이 왕위를 잃고 영월로 유배된 뒤 맞이한 비극은 조선 사회 전체를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외면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엄흥도는 모두가 고개를 돌린 순간에 홀로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선택은 한 개인의 결단이었지만, 그 의미는 시대의 도덕과 충의를 다시 묻게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권력보다 인간의 의리를 택한 한 사람의 삶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충의공, 엄흥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 성명 / 이름
엄흥도 (嚴興道)
❖ 본관
영월 엄씨 군기공파 충의공계


❖ 생년월일
미상 1404년 추정
❖ 사망일
미상 1474년 추정
❖ 향년 / 나이
70세 추정


❖ 가계도 / 가족관계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 부인
미상
자녀
엄호현 / 엄광순 / 엄성현
손자
엄화
❖ 묘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조림산
❖ 시호
충의공 (忠毅公)


❖ 추증 벼슬
공조참판
❖ 엄흥길 삶, 생애 그리고 평가
엄흥도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단종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은 충신으로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본관은 영월 엄씨이며,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대략 1404년 무렵에 태어나 1474년경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삶은 높은 관직이나 화려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인 단종의 죽음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1457년,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한 뒤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내려 죽게 했습니다. 단종의 죽음 이후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왕명을 어기는 것은 곧 가문 전체의 멸망을 뜻했기에,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영월 지역의 관리와 백성들 역시 깊은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나선 인물이 바로 엄흥도였습니다. 엄흥도는 당시 영월의 호장으로, 지방 행정을 담당하던 중인이었습니다. 그는 단종이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에 의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결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적 연민을 넘어, 임금을 임금으로 예우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엄흥도는 스스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고, 아들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모든 과정은 발각될 경우 즉시 처형당할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곧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가문의 운명 전체를 내거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정중히 안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가 치러지던 날 날씨가 매우 험했고 눈보라가 몰아쳐 땅을 파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산속에 있던 노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났고, 그 자리에 눈이 녹아 맨땅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엄흥도 일행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그 자리에 단종을 매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훗날 숙종 대에 단종이 복권된 뒤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 묘를 살폈는데, 이미 천하의 명당이라 하여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정비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종의 장례를 마친 뒤, 엄흥도는 더 이상 관직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벼슬을 내려놓고 가족들과 함께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관에서는 단종의 시신과 함께 사라진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하면서도 끝내 고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엄흥도와 그의 가족은 이후 숨어 지내며 조용히 여생을 마쳤습니다.


엄흥도의 충절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차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조 대에 이미 그의 후손은 단종의 묘역을 돌보는 역할을 맡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의 공적이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현종과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송시열 등의 건의로 후손들이 벼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엄흥도 역시 충신으로서 공식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숙종 24년에는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고, 영조 대에는 종2품 가선대부 공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영조가 직접 제문을 내려 제향하도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순조 때에는 공조판서로, 고종 13년에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이는 일개 지방 아전 출신이었던 인물에게 내려진 파격적인 예우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행위가 얼마나 중하게 평가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정조가 단종의 충신들을 정리하여 공훈의 경중을 논할 때에도, 엄흥도는 직접 목숨을 바친 인물들 바로 다음에 위치시켜졌다고 전해집니다. 조선 사회에서 장례는 인간의 도리이자 유교적 질서의 핵심이었기에, 모두가 두려움에 침묵할 때 임금의 장례를 치른 그의 선택은 생육신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지니고 김시습과 함께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을 쌓아 초혼제를 올린 뒤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오늘날 동학사의 숙모전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영월의 창절사와 장릉 경내 충신각, 문경의 여러 서원에도 그의 위패가 남아 있습니다. 영조 대에 세워진 그의 정려각은 현재 장릉 안으로 옮겨져 그 충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엄흥도의 삶은 위선피화 오소감심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그의 각오는, 권력 앞에서 침묵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맞서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지방 관리였던 엄흥도의 행동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조선 사회가 지향하던 충의의 본모습으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그의 충성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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