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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연구센터

조세이 탄광 위치 지도|유골 발굴|강제 징용 희생자 피해자|수몰 원인|

by 정보주민센터 2026.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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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이 탄광 위치 지도|유골 발굴|강제 징용 희생자 피해자|수몰 원인|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의 바닷속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한순간에 앗아간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장생 탄광에서는 전쟁으로 석탄 생산량을 늘리려는 분위기 속에서 위험한 해저 채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조선에서 동원된 노동자들도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해저 갱도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갱도 안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었고, 조선인 136명을 포함한 노동자 183명이 빠져나오지 못한 채 희생됐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정보 통제로 인해 사고의 참상은 오랫동안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고, 희생자들의 가족들 역시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소식을 쉽게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유족과 시민단체가 잊혀진 이름들을 하나씩 찾아내면서 장생 탄광 수몰사고는 강제동원 역사의 아픈 흔적으로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바닷속 갱도에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노력은 사고 발생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장생 탄광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날 그곳에서 살기 위해 일했던 사람들의 삶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무게를 마주하게 됩니다.


❖ 조세이 탄광 위치 / 지도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니시키와촌 연안

 

❖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발생일

1942년 2월 3일 오전 6시

 

❖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인명 피해

사망 183명

 

❖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원인

해저면과 갱도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상태에서 무리하게 채굴 작업을 진행

❖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앞바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한순간에 뒤흔든 참혹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군수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석탄 생산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기, 우베에 자리하고 있던 장생 탄광에서 해저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갱도 안에서 작업하던 노동자 183명이 한꺼번에 매몰됐으며, 그 가운데 조선 출신 노동자가 136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육지에서 약 1.1km 떨어진 바닷속 탄광에서 벌어진 사고였기 때문에 생존자 구조와 시신 수습조차 쉽지 않았고, 사고의 참상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희생자들의 유골과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으며,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와 유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사건을 기억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시작된 해저 조사와 유해 발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를 오늘날까지 이어주고 있습니다.

장생 탄광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던 탄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베는 예전부터 여러 탄광이 운영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장생 탄광은 1932년부터 본격적인 조업을 시작한 해저 탄광이었습니다. 해저에서 석탄을 캐는 작업은 일반적인 탄광보다 위험성이 높았지만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 지급되는 곳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높은 위험성 때문에 일본인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빈자리를 조선인 노동자들이 채우게 됐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동원이 겹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동원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각지의 탄광과 공장, 건설 현장 등에서 노동을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장생 탄광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했던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날은 1942년 2월 3일이었습니다. 당시 오전 6시 무렵, 육지에 있는 탄광 입구에서 약 1.1km 떨어진 해저 갱도에서 갑작스럽게 천장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해저 아래에서 이어지던 갱도에 문제가 생기면서 바닷물이 갱도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갱도 안에 갇히게 됐습니다. 당시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183명으로, 조선 출신 노동자 136명과 일본인 노동자 47명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사고가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단순한 자연재해나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사고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해저 탄광에서 작업할 경우에는 지반과 해수면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고 일정한 안전 기준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 기준상 얕은 곳에서 채굴할 때에는 해저에서 일정 깊이 이상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했지만, 장생 탄광에서는 최심부가 약 37m에 불과한 곳까지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당시 요구되던 기준보다 훨씬 얕은 수준이었습니다. 여기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제국이 군수물자 생산을 확대했고, 이를 위해 석탄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안전을 충분히 확보하기보다 생산량을 높이는 것이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무리한 채굴이 이어졌고, 결국 대규모 사고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전해집니다.

 

사고 직후의 상황 역시 참혹했습니다. 갱도 안에 갇힌 노동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지만 해저 갱도라는 특성 때문에 접근과 구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사고 당일 갱도 입구 부근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헌병대가 갱도 입구를 봉쇄했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의 접근이 통제되고 정보가 제대로 외부에 전달되지 못하면서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 사회 전반에 강한 정보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중대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었습니다.

장생 탄광은 결국 1945년 폐광됐습니다. 하지만 폐광과 함께 사고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사라진 탄광의 흔적과 달리 바닷속에는 희생자들이 남겨져 있었고, 가족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조선인 희생자들의 경우 일본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고향의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족들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까지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장생 탄광 사고 이전에도 우베 지역에서는 대규모 탄광 사고가 발생한 바 있었습니다. 1915년 히가시미초 탄광에서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장생 탄광 수몰사고 역시 그에 못지않은 희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장생 탄광 사고가 발생한 시기는 태평양전쟁이 막 시작된 시점이었고, 전쟁 수행을 위해 사회 전체가 동원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고에 관한 정보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고 희생자들의 존재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히게 됐습니다.

 

시간이 흘러 1982년 4월 17일에는 지역 자치회장 등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장생 탄광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잊혀 있던 희생자들을 지역사회가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추모비 하나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고의 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점차 이어졌습니다.

 

1991년 1월에는 일본 시민단체인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 즉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단체는 장생 탄광 사고를 단순히 과거에 발생한 하나의 산업재해로 남겨두지 않고, 당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해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인 희생자들의 명부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습니다. 사고 발생 후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부 한국인 유족들이 가족의 사망 소식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은 한국에서도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1992년에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가 발족했고, 이후 한국의 유족들이 일본 현지를 찾아 추도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경을 넘어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유족들이 직접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가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끝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서 일했고, 어떻게 세상을 떠났으며, 왜 오랜 시간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1994년에는 일본 작곡가 이케베 신이치로가 장생 탄광 사고를 소재로 한 여성 합창조곡 '바다의 묘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바닷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이야기를 전하며 예술로 남기는 일 역시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2013년 2월에는 '새기는 모임'의 노력으로 장생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가 준공됐습니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을 향한 추모의 공간이 보다 분명하게 마련됐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7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 세대가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2007년 1월에는 대한민국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일본의 장생 탄광 수몰사고에 관한 진상조사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이를 통해 장생 탄광 사고가 단순한 탄광 사고를 넘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의 한 사례로 다시 조명됐습니다. 사고 당시 갱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과 출신 지역, 가족 관계 등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과거를 현재로 이어주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해저에 남겨진 희생자들의 유골 문제였습니다. 사고 당시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희생자들이 갱도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고, 유족과 시민단체들은 오랫동안 유해를 찾고 고향으로 모셔오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습니다. 2023년 이후 일본 참의원 관련 위원회 등에서도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 반환 문제에 관한 질의가 여러 차례 이뤄지면서 이 문제는 다시 일본 사회의 공식적인 논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2024년 10월에는 시민들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마련된 자금으로 갱도 입구를 조사하고 잠수부들이 해저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현장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갱도 내부에는 탁한 물과 진흙이 가득했고 파손된 파이프 등이 길을 막고 있어 깊숙한 곳까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조사에서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 측에서도 안전 문제와 유골의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 조선인과 일본인 희생자의 유골이 섞여 있을 가능성 등을 이유로 국가 차원의 직접적인 조사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시민단체에서는 깊은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조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2025년 2월에는 장생 탄광 83주기 추모식이 현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했고, 국회의원과 정부 관계자, 재일동포 단체 관계자, 일본의 현직 및 전직 의원, 지역 관계자 등도 참석했습니다.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넘은 시간이 흘렀지만 추모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는 희생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DNA 검사를 진행하며 유해가 발견될 경우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도록 준비해왔습니다.

 

그리고 2025년 8월 25일, 오랜 시간 기다려온 의미 있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고 발생 83년 만에 희생자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바닷속에 묻혀 있던 희생자들의 흔적이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고 유족에게 돌려보내기까지는 DNA 감정 등 여러 절차가 필요했지만, 오랜 기간 이어진 유해 발굴 노력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었습니다.

 

2026년에도 유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논의는 계속됐습니다.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과 DNA 감정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관련 협력을 위한 절차가 이어졌습니다. 2월 6일에는 잠수 조사가 다시 시작됐으며 두개골을 비롯한 유골을 인양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다음 날 잠수 조사 과정에서 대만 출신 자원봉사 다이버가 고산소혈증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면서 조사는 잠정적으로 중단됐습니다. 과거의 희생자들을 찾기 위한 작업에서 또 다른 희생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매우 무겁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후 5월에는 한일 정상 간 논의에서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의 DNA 감정과 관련한 협의 절차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한 노력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같은 해 6월경에는 한국 극단 '58번 국도'와 일본 극단 '온센드래곤'이 함께 조세이 탄광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조세이탄광-살고 싶었다'를 공연했습니다. 8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사건이 무대 위에서 다시 이야기된 것입니다. 기록과 추모비, 유해 발굴뿐만 아니라 연극과 같은 문화예술을 통해서도 당시 사람들의 삶과 고통을 오늘날의 세대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생 탄광 수몰사고를 돌아보면 단순히 숫자로만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83명이라는 희생자 숫자 뒤에는 각각의 이름과 가족, 고향과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강제동원되어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게는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 위험한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그리고 사고 이후 가족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함께 바라봐야 이 사건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닷속 갱도에 남겨진 유골을 찾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다시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일이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한 사람의 존재를 역사 속에 다시 새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그 과정 자체가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생 탄광 수몰사고가 발생한 지 8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사고를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유족과 시민단체,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를 탓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과 강제동원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남깁니다.

 

바다 아래 깊은 곳에는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둡고 차가운 갱도 속에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유골과 이름들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기억하고 찾아 나서는 순간 다시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장생 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희생자들이 이제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이름과 삶이 더 이상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그날 이후 8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장생 탄광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겨진 유해를 찾고 신원을 확인하며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일, 그리고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기도 합니다. 긴 시간 동안 바닷속에 남겨져 있던 이들의 마지막 흔적이 하루빨리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그곳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모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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