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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역사인물

이웅평 미그기 귀순|나이 고향 계급|사망 원인|포상금|가족 부인 자녀

by 정보주민센터 2026.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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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평 미그기 귀순|나이 고향 계급|사망 원인|포상금|가족 부인 자녀


1983년 2월 25일, 평범했던 대한민국의 한낮에 갑작스럽게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며 전국이 긴장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북한 공군의 미그-19 전투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남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대한민국 공군은 즉시 전투기를 출격시켜 이를 요격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전투기의 날개가 흔들리면서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종사는 공격이 아닌 귀순 의사를 밝히며 대한민국 영공으로 들어왔고, 그가 몰고 온 전투기는 수원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당시 전투기를 직접 몰고 자유를 찾아온 사람은 북한 공군의 엘리트 조종사였던 이웅평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고향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아픔과 건강 악화라는 시련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분단의 역사 한가운데에 이름을 남긴 이웅평의 삶과 그날의 긴박했던 귀순 사건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 성명 / 이름

이웅평 (李雄平)

 

❖ 본관

평창 이씨

 

❖ 생년월일

1954년 9월 28일

❖ 고향 / 태어난곳

평양시

 

❖ 사망일

2002년 5월 4일

 

❖ 사망지

경기도 성남시

❖ 향년 / 나이

47세

❖ 신체 사항

키 / 신장

180cm

 

❖ 학력

김책공군대학 (졸업)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6기)

 

❖ 주요 이력 / 경력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

대한민국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대한민국 공군대학 교관

대한민국 공군대학 교수

❖ 가계도 / 가족관계

부모님

아버지 이광정 (북한군 소좌)

어머니 맹성월

형제자매

누나 2명 / 남동생 1명 / 여동생 3명

배우자 / 부인

박선영 (건국대학교 출신 /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

자녀

딸 1명 / 아들 1명

 

❖ 이웅평 최종 군인 계급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

대한민국 공군

대령

❖ 이웅평 귀순 포상금 / 보상금

1983년 당시 약 13억 ~ 15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전해짐

❖ 이웅평 상훈 / 수훈

보국훈장 천수장

 

❖ 사망 원인 / 사인

간기능부전증

 

❖ 묘소 / 묘지

국립대전현충원 대전 유성구 현충원로 251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

❖ 귀순용사 이웅평

198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평범한 오전이 갑자기 긴박한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늘을 가르며 남쪽으로 내려오는 정체불명의 전투기가 포착되었고, 수도권 곳곳에는 실제 상황을 알리는 민방위 사이렌이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상의 전투기가 남하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긴급 출격한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이 이 미그기를 추적했고, 잠시 뒤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전투기가 공격을 위해 접근한 것이 아니라 날개를 흔들며 귀순 의사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게 한 명의 북한 공군 조종사가 자신이 몰던 미그 전투기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넘어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웅평이었습니다. 오늘은 냉전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던 시대, 자유를 찾아 하늘을 가로질렀던 귀순용사 이웅평의 삶과 그의 선택,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가족과 비극적인 말년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돌아보겠습니다.

 

이웅평은 1954년 9월 28일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창 이씨로 전해집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에서 평양시 사회안전부 소좌였던 아버지 리광정과 어머니 맹성월 사이에서 2남 5녀 가운데 장남이자 셋째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군과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훗날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공군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공군 제1비행사단에서 책임비행사로 복무하며 전투기를 직접 조종하는 엘리트 조종사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북한 공군에서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전문성과 신뢰를 필요로 하는 자리였으며, 이웅평 역시 뛰어난 비행 능력을 갖춘 조종사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훗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뒤 밝힌 이야기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북한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바닷가에서 우연히 비닐봉지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 비닐봉지는 당시 남한에서 판매되던 삼양라면 봉지였습니다. 북한에서 라면이라는 음식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이웅평은 포장지에 그려진 그림과 글을 살펴보면서 이것이 국수와 비슷한 식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가 봉지에 적힌 문구를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을 품게 됐다고 합니다. 제품에 문제가 있을 경우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을 가리켜 주민들의 삶이 비참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고 선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웅평이 발견한 작은 라면 봉지에는 소비자가 구입한 상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교환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식품 포장지 하나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남한의 모습과 실제로 적혀 있는 문구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됐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의문이 마음속에 쌓이면서 자신이 살아온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한 장의 라면 봉지만으로 그의 귀순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훗날 알려진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의심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1983년 2월 25일, 이웅평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그는 북한 공군 상위 계급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 계급으로 비교하면 대위에 해당하는 계급이었습니다. 그날 오전 10시 30분경 이웅평은 로켓 사격 훈련을 위해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에서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이륙했습니다. 원래는 두 대가 편대를 이루어 비행하고 있었지만, 이웅평은 갑자기 편대에서 이탈해 전투기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습니다. 이후 그는 뒤따르던 다른 전투기를 따돌리고 남쪽으로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한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공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 전투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웅평은 레이더에 발견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낮은 고도를 유지하면서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고 전해집니다. 약 920km/h에 달하는 속도로 비행하면서 황해남도 해주 상공을 지나 서해를 가로질렀고, 마침내 연평도 인근을 거쳐 남쪽으로 진입했습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방공망 역시 이 전투기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의 경계 태세가 높아져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미그 전투기가 남쪽으로 접근하자 대한민국 공군은 즉각 요격을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켰습니다. 하늘에서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졌고, 지상에서는 전투기가 침투했다는 소식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당시 수도권 일대에서는 민방위 사이렌까지 울리면서 국민들에게 실제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렸습니다. 평범하게 시작했던 하루가 순식간에 국가적인 비상 상황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들이 접근하자 이웅평은 자신의 전투기 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공격 의도가 없으며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은 미그기를 공격하는 대신 안전하게 유도했고, 결국 이웅평이 탄 전투기는 오전 11시 4분경 수원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북한 공군의 전투기였던 한 대의 미그기가 대한민국의 공군기지에 내려앉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린 조종사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넘어온 이웅평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무엇보다 북한 공군의 현역 조종사가 자신이 직접 몰던 전투기를 타고 귀순했다는 사실이 전례 없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웅평은 대한민국에 도착한 뒤 북한의 군사 체계와 공군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했고, 군사적으로도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 공군에서 실제 전투기를 운용하던 조종사였던 만큼 그가 알고 있던 정보의 가치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귀순자가 가지고 온 물건이나 장비 등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웅평은 자신이 직접 몰고 온 미그 전투기로 인해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됐습니다. 알려진 금액은 15억 원으로, 1983년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돈이었습니다. 현재의 화폐 가치로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사회에서 일반인이 쉽게 상상하기 힘든 큰 금액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웅평의 귀순을 단순히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사건으로만 바라보기에는 그 이후 그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너무나 컸습니다.

귀순한 지 약 3개월 뒤인 1983년 5월, 이웅평은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했습니다. 북한 공군에서 쌓은 전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공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며 군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1984년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이후에도 공군에서 계속 근무했고 1995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습니다.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과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경험과 전문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웅평은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귀순 인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걱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신이 북한을 떠나는 순간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2남 5녀 가운데 장남이었기에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신은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북한에 남겨진 부모와 형제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북한 당국은 귀순한 이웅평의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었고, 부모와 형제들이 정치범수용소 등에 보내졌다는 탈북민들의 증언이 이후 전해졌습니다.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이웅평에게도 그 사실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유를 얻은 대가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웅평은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북한에서 공군 조종사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공군에 도움을 주었고, 군사 분야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했습니다. 한 사람의 귀순이 단순한 개인의 탈출을 넘어 당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과 정보전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던 만큼, 그의 삶에는 늘 자신이 선택한 귀순의 의미와 그에 따른 책임이 함께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삶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97년 갑작스럽게 간경화로 쓰러진 이웅평은 간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한때 회복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거부 반응이 발생하면서 건강이 다시 악화됐습니다. 결국 오랜 투병 끝에 2002년 5월 4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간기능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47세였습니다. 북한의 하늘을 떠나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지 약 19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사망 후에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이웅평의 삶을 돌아보면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1983년 2월 25일 그가 전투기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던 순간은 단순한 비행 경로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사회를 떠나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결단이었고, 동시에 남겨진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모두 걸어야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수십 분 동안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지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짧은 비행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날 대한민국 전역을 긴장시켰던 사이렌입니다. 평범했던 일상 속에서 갑자기 울려 퍼진 민방위 경보와 긴급 출격한 전투기, 그리고 그 하늘을 가로질러 내려온 한 대의 미그 전투기는 당시 분단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국민들에게는 전쟁이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을 일깨운 사건이었고, 군에게는 북한 공군 조종사의 귀순이라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웅평 개인에게는 그 순간이 자유를 향해 내디딘 인생의 결정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당시의 상황을 직접 기억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3년 2월 25일, 한 북한 공군 조종사가 미그 전투기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에 귀순했다는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뒤 대한민국 공군에서 대령까지 진급하며 새로운 삶을 살았던 이웅평은 47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과 그가 남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날의 사이렌이 단순한 과거의 기억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웅평에게 1983년 2월 25일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날이었습니다. 자유를 향해 전투기의 방향을 돌렸던 한 조종사의 선택, 그 선택으로 인해 얻은 새로운 삶과 감당해야 했던 가족에 대한 아픔, 그리고 끝내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은 단순히 한 귀순 사건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이야기를 남깁니다. 하늘을 가르며 남쪽으로 날아왔던 그날의 기억과 함께, 자유를 찾아 자신의 운명을 바꾼 귀순용사 이웅평의 이름은 앞으로도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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