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서 별세|나이|향년|정의봉|고향|부인|자녀|사망 원인|사인
박기서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살아낸 인물입니다. 1948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평범한 서민으로 살아가던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을 향한 깊은 존경과 민족 정의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부천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던 중에도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결국 1996년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함으로써 세상에 강한 울림을 남겼습니다. 그는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많은 이들로부터 ‘정의로운 행동’이었다는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후 택시 기사로 일하며 다시 일상을 살아갔고, 효창공원 성역화 운동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박기서 선생의 삶은 정의를 향한 뜨거운 신념과 조용한 실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깊은 물줄기 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 이름
박기서
❖ 생년월일
1948년 12월 9일
❖ 고향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
❖ 나이 / 향년
76세 (2025년 기준)
❖ 사망
2025년 7월 10일
❖ 현 거주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 본관
반남 박씨
❖ 직업
택시기사
❖ 경력
효창공원 애국지사묘역 복원 추진위원장
❖ 가족관계
배우자 / 부인
원미자
자녀
아들 1명 / 딸 2명
❖ 신체
키
160cm
❖ 종교
가톨릭(세례명 : 요셉)
❖ 사망원인 / 사인
2024년부터 건강 악화로 외부 활동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 빈소
부천장례식장 7호실
❖ 발인
7월 12일 오전 5시
❖ 발인
화성함백산추모공원
❖ 정의봉
박기서 선생이 안두희를 격살할 때 사용한 도구는 그가 '정의봉'이라 이름 붙인 40cm 길이의 몽둥이였습니다. 이 도구는 사건 직후 경찰에 의해 증거물로 압수되었으나, 재판 후에는 이례적으로 박기서 선생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범행 도구는 형 선고와 함께 몰수되어 폐기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정의봉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이는 논어의 구절로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는 뜻으로,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남긴 글귀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박기서 선생은 이 정의봉을 집에서 한지로 감싸 소중히 보관해왔으며, 2018년 10월에는 당시 범행에 사용된 밧줄, 장난감 권총과 함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여 역사 자료로 보존되게 했습니다.
❖ 박기서 선생 소개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를 직접 찾아가 처단했던 박기서 선생이 2025년 7월 10일 별세했습니다. 향년 78세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박기서 선생께서 별세하셨다”고 전하며 고인의 생전 행적과 뜻을 기렸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친일 잔재 청산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을 주도해온 역사 시민단체로, 박기서 선생의 활동에도 큰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박기서 선생은 1948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된 후 경기도 부천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생계를 위해 버스 운전사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은 1996년 가을,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와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해방 이후 혼란 속에서도 조국의 진정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김구 선생의 삶과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민족을 배신한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 선생은 마침내 안두희의 주거지를 알아내고 그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손에는 ‘정의봉’이라 이름 붙인 40cm 길이의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박 선생은 안두희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고, 결국 안두희는 현장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박 선생은 즉시 경찰에 자수하며, “김구 선생님은 내 마음 속의 스승이었다. 의로운 일을 했다고 확신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그의 이 같은 행동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김구 선생 암살의 진실이 여전히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안두희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박기서 선생의 행동은 단순한 ‘살인’이 아닌 ‘역사적 심판’이라는 평가도 뒤따랐습니다.
박 선생의 구속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그를 위한 탄원과 구명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박기서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에는 9,200명이 서명하였고, 많은 인사들이 법원에 탄원을 제출하며 그의 의로운 동기를 이해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1997년 4월, 1심 재판부는 박기서 선생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열린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2년 감형되어 징역 3년이 선고되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모방범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안두희에 대한 국민적 분노,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동기, 그리고 자수한 점 등을 참작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습니다. 1997년 11월 대법원은 이 형을 확정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98년, 김대중 정부는 박기서 선생에 대한 특별사면을 추진했고, 그는 결국 복역 1년 5개월 만인 3월 13일, 조용히 사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출소 후에는 택시 기사로 일하며 다시 생업에 종사했고, 동시에 애국지사들의 묘역이 위치한 효창공원의 보존과 성역화를 위한 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는 ‘효창공원 애국지사묘역 복원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효창공원을 단순한 도심의 공원이 아닌 민족정신의 성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박기서 선생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특히 작년부터는 지병이 심해져 운전은 물론 외부 활동조차 어려운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조용히, 그러나 확고한 신념을 간직한 채 생을 이어갔습니다.
박기서 선생의 장례는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치러지며, 빈소는 경기도 부천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되었습니다. 발인은 12일 오전 5시에 진행되며, 장지는 화성함백산추모공원입니다.
박기서 선생은 평범한 삶 속에서도 ‘정의’와 ‘역사’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법과 제도 밖에서도, 스스로가 옳다고 믿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결단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생을 마감한 그의 뜻이 훗날에도 바르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박기서 선생의 삶은 한 개인의 정의감이 어떻게 역사적 울림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여정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민족애와 불의에 대한 단호한 결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많은 논쟁을 낳았지만, 시대가 외면한 정의를 다시 되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은 긴 여정을 마치고 조용히 잠드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의 뜻을 기억하고, 왜 그런 결단이 필요했는지를 사회가 성찰하는 것입니다. 깊은 애도를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정의로운 그 마음, 오래도록 잊지 않겠습니다.
2025.05.14 - [정치연구센터] - 김용만 국회의원 프로필|나이|고향|지역구|김구|학력|병역|결혼
김용만 국회의원 프로필|나이|고향|지역구|김구|학력|병역|결혼
김용만 국회의원 프로필|나이|고향|지역구|김구|학력|병역|결혼김용만은 제2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하남시 을 지역구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
information.homeostasises.com
'정치연구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홍주 특검보 프로필|나이|고향|판사|학력|경력|변호사|연수원 (1) | 2025.07.10 |
---|---|
안미현 검사 프로필|나이|고향|학력|경력|사법연수원 기수|임은정 (2) | 2025.07.09 |
한지아 의원 프로필|나이|지역구|남편|의사 출신|학력|경력|가족 (1) | 2025.07.09 |
김효은 프로필|지역구|나이|고향|학력|강사|출신|결혼|남편| (0) | 2025.07.09 |
오정희 특검보 프로필|나이|고향|검사|경력|학력|김건희 특검| (1) | 2025.07.09 |